2025-09-18 23:57

  • 관용은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생각이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공존을 모색하는 적극적인 지적, 윤리적 태도이다.

  • 관용은 개인의 내면적 성숙은 물론, 갈등을 해결하고 다원성을 꽃피워 사회 전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필수적인 운영체제(OS)와 같다.

  • 하지만 관용은 무제한적이지 않으며, 관용 자체를 파괴하려는 ‘비관용’에 대해서는 관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관용의 역설’이라는 중요한 한계를 가진다.

관용 사용 설명서: 당신의 세상을 넓히는 가장 강력한 도구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 다양한 가치관과 연결되어 살아간다. SNS 피드를 넘기면 나와 전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의 글이 보이고, 거리에서는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을 마주친다. 이 무한한 연결의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무엇일까? 많은 전문가는 주저 없이 **‘관용(Tolerance)‘**을 꼽는다.

하지만 우리는 관용을 오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저 ‘싫어도 참는 것’ 정도로 여기거나,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무관심과 혼동하기도 한다. 이 핸드북은 관용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분해하고 재조립하여, 개인의 삶과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성장시키는 강력한 도구로 사용하는 법을 안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1. 관용은 왜 만들어졌는가: 고통 속에서 피어난 생존의 지혜

관용이라는 개념은 낭만적인 이상 속에서 탄생하지 않았다. 그것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갈등의 역사 속에서 인류가 찾아낸 처절한 생존의 기술이었다.

종교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16~17세기 유럽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끔찍한 종교 전쟁으로 불타올랐다. ‘나의 신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믿음은 서로를 향한 잔혹한 학살로 이어졌다. 수십 년간의 전쟁 끝에 유럽인들이 얻은 교훈은 명확했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제거하려 들면, 결국 남는 것은 공멸뿐이라는 것이다.

이때 존 로크(John Locke)와 같은 사상가들은 “국가가 개인의 신앙을 강제해서는 안 된다”며 종교적 관용을 주장했다. 이는 ‘상대의 신앙이 틀렸지만, 그 신앙을 믿을 개인의 권리는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의 전환이었다. 즉, 관용은 나의 신념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신념이 존재할 공간을 인정해주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다원주의 사회의 필연적 요청

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관용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종교뿐만 아니라 인종, 국적, 성별, 정치적 이념, 생활 방식 등 사회를 구성하는 가치관이 폭발적으로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사회가 단 하나의 ‘올바른’ 삶의 방식만을 고집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배척되고, 사회는 끊임없는 갈등과 분열에 휩싸일 것이다.

결국 관용은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운영체제(OS)**와 같다. 각기 다른 애플리케이션(개인)이 충돌 없이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려면, 그 모두를 포용하는 안정적인 OS(관용)가 필수적인 것이다.

2. 관용의 구조: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가

관용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그 구조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관용은 흔히 오해되는 개념들과 명확히 구분될 때 비로소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관용의 3요소

관용은 다음 세 가지 핵심 요소로 이루어진 적극적인 태도다.

  1. 인지(Cognition): 나와 다른 생각, 가치, 존재가 있음을 받아들이는 단계. 여기에는 불편함이나 반대의 감정이 동반될 수 있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2. 존중(Respect): 비록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상대방이 그런 생각을 가질 권리, 그런 존재로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단계. 이것은 상대를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는 윤리적 태도다.

  3. 공존(Coexistence): 다름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갈등을 관리하고 질서를 모색하는 단계다. 이는 소극적 인내를 넘어선 실천적 행위다.

관용과 유사 개념 비교

관용은 종종 아래 개념들과 혼동되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개념정의관용과의 차이점
관용 (Tolerance)싫거나 동의하지 않는 것을 견디고, 그것이 존재할 권리를 인정함.적극적인 지적/윤리적 판단이 개입됨. ‘다름’을 인지하고 그 권리를 존중함.
무관심 (Indifference)타인의 생각이나 존재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나 감정이 없음.판단 자체가 부재함. 존중이 아닌 무시나 방관에 가까움.
체념 (Resignation)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마지못해 받아들임.힘의 논리에 굴복하는 소극적 상태. 권리에 대한 인정이 없음.
수용 (Acceptance)타인의 생각이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통합함.관용을 넘어선 적극적 긍정. 관용은 ‘동의’까지 요구하지 않음.

예를 들어, 채식주의자가 육식을 하는 친구를 대할 때를 생각해보자.

  • 관용: “나는 육식이 환경과 동물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에 반대하지만, 네가 육식을 할 선택의 자유는 존중해. 우리는 함께 식사할 방법을 찾아보자.”

  • 무관심: “네가 뭘 먹든 내 알 바 아니야.”

  • 체념: “어차피 세상 사람들 다 고기 먹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어.”

  • 수용: “네 얘기를 듣고 보니 육식의 즐거움도 이해가 가네. 나도 가끔은 시도해볼 수 있겠다.”

이처럼 관용은 나의 가치관을 지키면서도 상대의 공간을 침해하지 않는, 섬세하고 지적인 균형 감각을 요구한다.

3. 관용 사용법: 일상에서 실천하는 기술

관용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일상에서 훈련하고 사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술이다.

1단계: 내 안의 ‘비관용’ 스위치 인지하기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에 불쾌감이나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잠시 멈춰 서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 “나는 지금 왜 화가 났을까?”

  • “나의 어떤 신념이나 가치관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는가?”

  • “상대방은 정말로 나를 공격하려는 의도였을까, 아니면 단순히 나와 다른 배경을 가졌기 때문일까?”

자신의 감정적 반응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비관용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2단계: ‘판단’ 대신 ‘질문’하기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기보다 판단하는 데 익숙하다. 나와 다른 의견을 들었을 때 “그건 틀렸어!”라고 말하는 대신,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셨어요?”라고 질문을 던져보자. 질문은 방어적인 태세를 허물고, 상대방의 생각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다리를 놓아준다. 이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효과적인 표현이다.

3단계: 공통의 기반 찾기

아무리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도 어딘가에는 공통점이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정치적으로 극단에 있는 두 사람이라도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나 ‘정의로운 사회를 바라는 마음’과 같은 보편적인 가치에서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이처럼 의견의 차이점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공통점에 집중할 때, 우리는 서로를 ‘적’이 아닌 ‘다른 생각을 가진 이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4단계: 적극적으로 경청하고 배우기

나와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불편하게 여겼던 사회적 소수자의 삶에 대한 책을 읽는 등, 의도적으로 나의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나의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타인의 입장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 관용은 앎에서 시작되고, 앎은 배우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4. 심화 과정: 관용의 한계와 역설

관용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관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명확한 한계와 위험성을 알아야 한다.

관용의 역설 (The Paradox of Tolerance)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가 제기한 ‘관용의 역설’은 관용의 가장 중요한 딜레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제한적인 관용은 반드시 관용의 소멸을 초래한다. 만약 우리가 비관용적인 자들까지도 관용한다면, 만약 우리가 관용적인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비관용의 공격으로부터 사회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관용적인 자들은 파괴될 것이고, 그들과 함께 관용도 파괴될 것이다.”

쉽게 말해, ‘모든 것을 관용해야 한다’는 생각은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폭력을 선동하고 특정 집단에 대한 증오를 퍼뜨리는 사상(파시즘, 인종차별주의 등)이 있다. 이 사상은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짓밟고 관용적인 사회의 근간을 무너뜨리려는 명백한 ‘비관용’이다. 만약 우리가 “저들의 비관용적인 사상도 존중해야지”라며 관용을 베푼다면, 결국 그들에 의해 우리 사회의 관용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비관용에 대해서는 관용하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물론 그 기준을 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관용’의 이름으로 폭력과 혐오, 그리고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까지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분명하다.

관용해서는 안 되는 것

  • 폭력과 위협: 물리적, 언어적 폭력은 타인의 안전과 존엄성을 직접적으로 파괴하는 행위이므로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없다.

  • 차별과 혐오: 개인의 정체성(인종, 성별, 종교 등)을 이유로 부당하게 차별하거나 혐오를 조장하는 행위는 관용적 사회의 기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 진실 왜곡과 선동: 민주적 토론의 기반이 되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거짓 정보로 사회적 불신과 혼란을 야기하는 행위는 건강한 공론장을 파괴한다.

결론: 관용은 약함이 아닌, 가장 용감한 선택

관용은 나약함이나 무기력함의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의 신념을 굳건히 가지면서도, 나와 다른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것은 엄청난 지적 용기와 내면의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관용을 실천하는 것은 때로 불편하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고,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며, 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한다. 사회적으로는 불필요한 갈등 비용을 줄이고, 다양한 재능과 아이디어가 자유롭게 발현되는 혁신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당신이 오늘 마주치는 불편한 의견, 낯선 문화, 이해할 수 없는 세대가 있다면, 이 핸드북을 떠올려보자. 그 순간은 당신의 세상을 한 뼘 더 넓힐 수 있는 기회다. 관용이라는 도구를 손에 쥐고, 기꺼이 그 문을 열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