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10 22:29

  • 경제학에서 ‘회피’는 불확실성이나 손실 가능성을 피하려는 인간의 심리적 경향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다.
  • 대표적으로 ‘위험 회피’와 ‘손실 회피’가 있으며, 이는 각각 기대효용이론과 전망이론을 통해 이론화되었다.
  • 이러한 회피 성향은 투자, 보험, 소비 등 우리의 모든 경제적 의사결정에 깊숙이 영향을 미친다.

서론: 우리는 왜 ‘회피’하도록 설계되었나

당신 앞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아무런 조건 없이 50만 원을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오면 100만 원을 받고 뒷면이 나오면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수학적인 기댓값은 두 선택지 모두 50만 원으로 동일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주저 없이 ‘확실한 50만 원’을 선택한다.

왜일까? 이것이 바로 경제학에서 말하는 ‘회피(Aversion)’ 심리의 시작이다. 인간은 단순히 이익의 크기만으로 판단하는 계산기가 아니다. 불확실성이라는 안개와 손실이라는 고통을 본능적으로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 핸드북은 전통 경제학의 합리적 인간상을 넘어, 현실 속 인간의 선택을 지배하는 ‘회피’ 심리의 탄생 배경과 구조, 그리고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있게 탐구한다.

1부: 만들어진 이유 - 완벽한 인간은 없었다

전통 주류 경제학은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즉 경제적 인간이라는 가상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이익(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완벽하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존재다. 하지만 현실 세계의 사람들은 종종 이 모델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보였다.

  • 수수께끼 1: 왜 사람들은 손해를 보면서 보험에 가입할까? 보험의 총 납입액은 사고 시 받을 보험금의 기댓값보다 항상 높게 설계된다. 수학적으로만 보면 손해인 셈이다.

  • 수수께끼 2: 왜 투자자들은 손실 난 주식을 팔지 못하고 이익 난 주식은 서둘러 팔까? 합리적이라면 미래 성장 가능성을 보고 판단해야 하지만, 현실은 반대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변칙(Anomaly)‘들을 설명하기 위해 경제학자들은 심리학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인간의 의사결정이 불확실성과 손익의 프레임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설명하는 ‘회피’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이는 경제학이 인간을 더 현실적으로 이해하려는 위대한 시도의 산물이다.

2부: 위험 회피 (Risk Aversion) - 확실함에 대한 선호

위험 회피는 경제학에서 가장 먼저 정립된 회피 개념이다.

2.1 개념 정의

위험 회피란, 동일한 기댓값을 가진다면 불확실한 결과(도박)보다 확실한 결과를 더 선호하는 성향을 말한다. 서론의 예시처럼, 100만 원을 받을 수도 있는 불확실성보다 확실한 50만 원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2.2 구조: 기대효용이론과 한계효용 체감

위험 회피 성향은 ‘기대효용이론(Expected Utility Theory)‘과 ‘부의 한계효용 체감(Diminishing Marginal Utility of Wealth)’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1. 효용(Utility): 만족감의 크기를 나타내는 주관적인 값.

  2. 한계효용(Marginal Utility): 재화나 자산을 한 단위 더 소비하거나 얻었을 때 추가로 느끼는 만족감.

핵심은 **“돈이 많아질수록 돈 1원이 주는 추가적인 기쁨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 재산이 0원인 사람에게 1억 원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쁨을 주지만, 100억 자산가에게 추가적인 1억 원은 그 정도의 감흥을 주지 못한다.

이를 그래프로 그리면 위로 볼록한(오목한, Concave) 형태의 효용 함수가 나타난다.

  • 수학적 표현: U(E[x]) > E[U(x)]

    • E[x]는 도박의 기댓값(예: 50만 원)이고, U(E[x])는 그 기댓값에 해당하는 효용(확실한 50만 원이 주는 만족감)이다.

    • E[U(x)]는 도박에 참여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효용의 기댓값(0원의 효용과 100만 원의 효용의 평균)이다.

    • 오목한 함수에서는 항상 전자가 후자보다 크다. 따라서 위험 회피적인 사람은 도박을 선택하지 않는다.

성향효용 함수 형태설명
위험 회피적 (Risk Averse)오목 함수 (Concave)확실한 결과를 불확실한 결과보다 선호. (대부분의 사람)
위험 중립적 (Risk Neutral)선형 함수 (Linear)기댓값만 같다면 확실성과 불확실성을 동일하게 평가.
위험 선호적 (Risk Seeking)볼록 함수 (Convex)불확실한 결과를 확실한 결과보다 선호. (도박꾼)

2.3 사용법: 현실 속 위험 회피

  • 보험: 우리는 매달 확실한 작은 손실(보험료)을 감수함으로써, 발생 확률은 낮지만 치명적인 큰 손실(사고, 질병)의 불확실성을 제거한다.

  • 금융 투자: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격언처럼, 분산 투자를 통해 포트폴리오의 전체 변동성(위험)을 낮추려 한다. 경제 위기 시 안전 자산(금, 달러) 선호 현상도 같은 맥락이다.

3부: 손실 회피 (Loss Aversion) - 이익의 기쁨보다 손실의 고통

위험 회피가 불확실성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라면, 손실 회피는 결과의 방향성, 즉 ‘이익이냐 손실이냐’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다룬다.

3.1 개념 정의

손실 회피란, 동일한 크기의 이익에서 얻는 기쁨보다 손실에서 느끼는 고통을 심리적으로 훨씬 더 크게 느끼는 경향을 말한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는 연구를 통해 손실의 고통이 이익의 기쁨보다 약 2~2.5배 강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0만 원을 얻었을 때의 기쁨을 +10이라고 한다면, 10만 원을 잃었을 때의 고통은 -20에서 -25에 달한다는 의미다.

3.2 구조: 전망이론 (Prospect Theory)

손실 회피는 ‘전망이론(Prospect Theory)‘의 핵심 개념이다. 전망이론은 기대효용이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인간의 선택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했으며, 세 가지 주요 특징을 가진다.

  1. 준거점 의존성 (Reference Dependence): 사람들은 절대적인 부의 총량이 아니라, 특정 기준점(준거점)을 기준으로 이익과 손실을 판단한다. 주식 투자자에게 준거점은 보통 ‘매입 가격’이 된다.

  2. 민감도 체감성 (Diminishing Sensitivity): 이익이든 손실이든, 그 크기가 커질수록 변화에 대한 민감도는 둔해진다. 1만 원에서 2만 원으로 이익이 늘 때의 기쁨이 100만 원에서 101만 원으로 늘 때의 기쁨보다 훨씬 크다.

  3. 손실 회피 (Loss Aversion): 앞서 설명한 대로, 가치 함수의 기울기가 이익 구간보다 손실 구간에서 훨씬 더 가파르다.

이러한 특징들은 S자 형태의 ‘가치 함수(Value Function)‘로 시각화된다. 이 그래프는 손실 회피가 인간의 의사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3.3 사용법: 손실 회피가 만드는 비합리적 행동

  • 처분 효과 (Disposition Effect): 투자자들이 이익이 난 주식은 너무 빨리 팔아버리고(작은 이익이라도 확실히 실현하려는 심리), 손실이 난 주식은 계속 보유하는(손실을 확정 짓는 고통을 피하려는 심리) 현상.

  • 소유 효과 (Endowment Effect): 어떤 물건을 소유하고 나면, 그것을 소유하기 전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현상. “내 것”이 되는 순간 준거점이 변하고, 그것을 잃는 것은 ‘손실’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ex: 중고 거래 시 판매자가 구매자보다 항상 높은 가격을 생각하는 경향)

  • 현상 유지 편향 (Status Quo Bias):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현재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경향. 변화는 잠재적 이익과 잠재적 손실을 모두 수반하는데, 손실 회피 심리 때문에 이익의 매력보다 손실의 두려움이 더 커서 변화를 꺼리게 된다.

4부: 심화 - 회피의 다양한 모습

4.1 위험 회피 vs 손실 회피: 결정적 차이

두 개념은 종종 혼용되지만, 명확한 차이가 있다.

구분위험 회피 (Risk Aversion)손실 회피 (Loss Aversion)
이론 기반기대효용이론전망이론
판단 기준최종 자산의 총량준거점 대비 이익/손실
관심 대상결과의 ‘불확실성’결과의 ‘방향성’ (이익 vs 손실)
핵심 원리부의 한계효용 체감 (오목한 효용 함수)손실의 고통이 더 큼 (가치 함수의 꺾임)
설명 예시왜 보험에 가입하는가?왜 손절매를 못 하는가?

쉽게 말해, 위험 회피는 “혹시나 잘못될까 봐” 불확실한 대박보다 확실한 중박을 선호하는 것이고, 손실 회피는 “본전 생각에” 잃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심리다.

4.2 모호성 회피 (Ambiguity Aversion)

이는 알려진 위험(risk)과 알려지지 않은 위험(ambiguity) 사이에서 전자를 선호하는 경향이다. ‘엘스버그의 역설’로 유명하다.

  • A 항아리: 빨간 구슬 50개, 검은 구슬 50개

  • B 항아리: 빨간 구슬과 검은 구슬이 총 100개 있지만, 비율은 모름

여기서 구슬 하나를 뽑아 색을 맞추면 상금을 준다고 할 때, 대부분의 사람은 비율을 정확히 아는 A 항아리에서 뽑기를 선호한다. 확률이 50%로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정보가 부족한 불확실성, 즉 ‘모호성’ 자체를 피하려는 것이다.

결론: ‘비합리적’ 인간을 이해하는 열쇠

경제학적 회피 심리들은 인간이 결코 ‘비합리적’이라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 생존하고 손실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진화해 온 매우 인간적인 심리적 장치다.

이러한 회피 성향을 이해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더 나은 투자와 소비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고, 기업에게는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케팅 전략(ex: “무료 체험 후 불만족 시 100% 환불” - 소유 효과와 손실 회피 활용)을 수립하는 데 영감을 준다. 나아가 정부 정책 설계자들은 사람들이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넛지(Nudge)‘를 설계하는 데 이 원리를 활용한다.

우리가 왜 주저하고, 왜 특정 선택에 끌리는지를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심리적 편향을 인지하고 더 현명한 의사결정을 향한 첫걸음을 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