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19 22:07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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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네팔에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는 단순한 정치적 이슈가 아닌, 오랫동안 누적된 정치적 혼란과 뿌리 깊은 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폭발적인 분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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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역사는 고립된 지리적 특성 속에서 외세의 영향을 받았고, 왕정과 민주화 세력, 그리고 마오주의 간의 끊임없는 권력 투쟁으로 점철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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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번 시위는 특정 외세(친중 또는 친인도)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부패한 정치 엘리트들의 만행과 민생 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절규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르다.
네팔 시위의 진실을 찾아서: 역사적 배경과 현재의 분노가 만나는 지점
최근 네팔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며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정부 청사가 불에 타고, 수감자들이 탈옥하며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인터넷과 SNS에는 이번 사태가 특정 정치 세력이나 외세에 대한 저항이라는 단순한 해석이 난무한다. 그러나 네팔 시위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표면적인 이유를 넘어, 오랜 시간 동안 응축되어 온 네팔의 복잡한 역사와 사회 구조를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이 핸드북은 네팔 시위의 배경을 역사적, 지리적, 정치적 측면에서 다각도로 분석하여 진실을 분별하는 데 도움을 제공한다.
1. 고산 지대에 숨겨진 역사: 네팔의 기원과 고립
네팔의 역사는 그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타국에 비해 기록이 매우 희박하다. 평균 고도 3,265m에 달하는 고산 지대라는 특성은 주변국과의 교류를 극히 제한하여, 고대사의 상세한 기록은 물론이거니와 고대 왕국(키라트 왕국, 말라 왕국 등)의 영토나 정치적 형태에 대한 정보조차 부족한 실정이다. 이는 마치 고대 일본처럼 주변국(중국, 한반도)의 기록에 의존해야만 역사의 퍼즐을 맞출 수 있는 상황과 유사하다.
네팔이 힌두교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도 바로 이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티베트와 국경을 맞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험준한 산맥으로 인해 중국-티베트와의 교류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반면, 남쪽으로는 고도가 점차 낮아져 인도와 자연스러운 교류가 가능했고, 이로 인해 인도 문화와 종교가 깊이 스며들었다. 오늘날 네팔 인구의 80% 이상이 힌두교도라는 사실은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영향을 명확히 보여준다. 수도인 카트만두는 이러한 지리적 환경 속에서도 비교적 평탄한 지형과 교통의 이점을 갖추고 있어 자연스럽게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다.
2. 근대 국가로의 통일과 외세의 개입
흩어져 있던 여러 부족과 왕국들을 하나로 통합한 것은 1768년 고르카 왕국의 왕이었던 프리트비 나라얀 샤였다. 이로써 ‘네팔 왕국’이라는 근대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었으나, 진정한 의미의 국제적인 기록이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약 50년 후인 1814년이었다.
1814년, 인도를 야금야금 점령해가던 영국 동인도 회사는 네팔의 영토까지 침공하며 영-네팔 전쟁이 발발한다. 네팔은 3년간의 치열한 저항 끝에 패배했으나, 이 과정에서 용맹함을 떨쳤던 네팔 병사들, 즉 구르카 용병은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당시 구르카 용병들은 근대 무기가 아닌 활과 칼로 영국군에 맞섰는데, 평균 고도 3,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생활하며 다져진 강인한 심폐지구력과 뛰어난 전투력은 영국군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패배였다. 이 패배 이후, 네팔 내부에서는 권력 투쟁이 더욱 격화된다. 1846년, 라나 가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샤 왕조의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실권을 장악한다. 라나 가문은 영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영국의 용병 요청에 따라 무려 16만 명의 네팔인을 파병하여 용병 장사를 통해 사리사욕을 채우기도 했다. 이들은 파병된 병사들의 급여를 착취하거나 쌀로 지급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고, 이는 국민들의 불만을 서서히 키워나갔다.
3. 왕정 복고와 민주주의의 충돌: 50여 년의 혼란
1930년대부터 라나 가문의 부패와 독재에 반발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일어났고, 특히 인도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이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섰다. 1947년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자, 민주화 세력들은 ‘네팔 국민회의’를 조직하며 본격적인 저항에 나선다.
1951년, 라나 가문의 독재에 불만을 품고 인도로 망명했던 트리부반 왕이 민주화 세력과 손잡으며 복잡한 삼파전이 형성된다. 그 결과, 네팔 왕과 라나 가문, 그리고 민주화 세력이 함께 권력을 분점하는 과도기적 연립 정부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 체제는 정치적 혼란만 가중시켰고, 1959년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헌법을 제정하고 국회의원 내각제를 채택한다.
하지만 새로운 혼란은 여기서 시작된다. 당시 왕이었던 마헨드라는 입헌군주로서의 역할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적인 통치를 원했다. 마침 중국의 티베트 점령과 같은 국제 정세가 네팔인들에게 불안감을 주자, 이를 명분 삼아 마헨드라 왕은 1961년 국회를 해산하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모든 권력을 다시 장악한다. 그는 ‘판차야트 제도’라는 독특한 비민주적 의원 선출 방식을 도입하며 왕정 체제를 복원했다. 이 시스템은 마을 대표가 도시 대표를 뽑고, 도시 대표가 도 대표를 뽑으며, 최종적으로 도 대표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겉으로는 민주적으로 보였으나, 실제로는 왕이 소수의 고위층을 매수하거나 임명함으로써 모든 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이후 1970년대 내내 계속된 민주화 시위 끝에 1990년, 드디어 대규모 ‘네팔 혁명’이 성공하며 입헌 군주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민주화의 결실은 또 다른 혼란의 시작이었다. 민주주의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모였던 다양한 세력들(온건 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등)은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자신들의 이념을 앞세우며 격렬하게 충돌했다. 그 결과, 1994년부터 2001년까지 단 7년 만에 총리가 아홉 번이나 교체되는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4. 마오이스트 내전과 왕정의 종식
정치적 혼란의 와중에 1996년, 극단적인 공산주의 세력인 마오이스트 반군이 무장 투쟁을 선언하며 내팔 내전이 발발한다. 이들은 입헌 군주제마저도 기득권의 도구라 비판하며 왕정을 완전히 폐지하고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내전은 2006년까지 10년간 이어지며 17,0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낳았다.
이 시기, 네팔 왕실에는 또다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2001년, 왕세자가 아버지인 비렌드라 국왕을 포함한 왕족 9명을 총으로 살해하는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으로 왕위에 오른 가넨드라는 내전을 명분으로 2002년 직접 통치를 선언한다. 그러나 이미 국민들의 신뢰를 잃은 왕정은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민주화 세력과 마오이스트 반군이 **‘왕정 폐지’**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손을 잡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를 통해 네팔의 왕정은 2008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네팔은 마침내 민주 공화국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왕정 폐지 이후에도 정치적 안정은 요원했다. 2008년부터 2025년까지 무려 13명의 총리가 교체되었을 정도로 정치 세력 간의 갈등은 끝없이 이어졌다.
5. 최근 시위와 SNS 선동, 현실 인식의 괴리
최근 네팔 정부가 SNS를 통한 가짜뉴스와 선동을 막겠다는 명목으로 26개의 SNS 플랫폼을 차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은 이번 시위를 친중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주의 시위로 해석하고 있으나, 이는 본질을 왜곡한 것이다. 이번 시위의 핵심 원인은 정치인들의 부패와 민생 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뿌리 깊은 분노다.
네팔 고위 정치인들의 자녀들이 호화로운 생활을 SNS에 과시하는 행태가 만연했으며, 이를 ‘네포 키즈(Nepo Kids, Nepotism kids)‘라 부르며 비판하는 것이 최근 몇 년 사이 유행처럼 번졌다. 국민들의 눈에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자신의 가족들에게 일감을 몰아주고 사치를 부리는 정치 엘리트들의 모습이 매우 불합리하게 보인 것이다. 이번 SNS 차단은 바로 이러한 국민들의 비판과 분노를 막기 위한 조치였고, 이는 오히려 국민들을 더욱 격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6. 결론: 역사를 이해하며 진실을 분별하는 습관
네팔의 시위는 특정 정치 이념이나 외세에 대한 단편적인 저항이 아니라,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복잡한 역사와 실패를 거듭한 민주주의 과정, 그리고 만성적인 부패가 빚어낸 총체적인 결과다. 단순히 ‘반중’ 또는 ‘민주화’ 시위로 규정하는 것은 네팔 국민들의 복잡한 감정을 외면하는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 온라인에 떠도는 단편적이고 자극적인 정보만을 신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오늘날은 미디어 비판 능력과 분별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대다. 출처가 불분명한 정보나 음모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다양한 관점과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스스로 진실을 찾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네팔의 이번 사태는 바로 그 중요성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