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18 23:50

  • 국가 정책은 단일하고 합리적인 이성을 가진 주체의 판단(모델 1)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 실제 결정은 거대한 정부 조직들이 각자 따르는 표준 운영 절차(모델 2)의 결과물이거나, 조직 내 권력자들이 벌이는 협상과 타협의 산물(모델 3)인 경우가 많다.

  • 그레이엄 앨리슨은 핵전쟁 직전까지 갔던 쿠바 미사일 위기를 이 세 가지 렌즈로 분석하며, 국가의 중대 결정이 내려지는 과정의 복잡한 본질을 파헤친다.

결정의 본질 완벽 핸드북: 쿠바 미사일 위기를 통해 본 국제 정치의 3가지 렌즈

“국가의 결정은 과연 누가, 어떻게 내리는가?”

이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하버드 대학교의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는 1971년, 국제정치학 분야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명저, 『결정의 본질(Essence of Decision)』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은 인류를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라는 단일 사건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본다. 하지만 목적은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 아니다. 앨리슨은 동일한 사건을 전혀 다른 세 가지 안경, 즉 세 개의 분석 모델로 조명하며 우리가 국가의 행동을 얼마나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한다.

이 핸드북은 『결정의 본질』이 제시하는 세 가지 모델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 왜 이 고전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국제 정세와 국가 정책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도구로 평가받는지 그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것이다.

제1부 만들어진 이유: 왜 하나의 사건에 세 개의 안경이 필요한가

전통적으로 국가의 외교 정책은 ‘합리적인 행위자’라는 단일한 렌즈를 통해 분석되었다. 즉, 국가는 체스판의 선수처럼 국익이라는 명확한 목표 아래 모든 정보를 종합해 최선의 수를 두는 존재로 여겨졌다. 하지만 앨리슨은 이러한 관점이 현실의 복잡성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보았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의 대응은 정말 ‘미국’이라는 단일한 의지가 내린 완벽한 합리성의 산물이었을까? 아니면 국방부, 국무부, CIA 등 거대한 조직들이 각자의 정해진 절차에 따라 움직인 결과였을까? 혹은 케네디 대통령과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매파 성향의 군 장성들 사이의 치열한 정치적 투쟁과 타협의 결과물이었을까?

앨리슨은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세 가지 분석 모델을 제시한다. 이는 마치 사건 현장을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세 대의 카메라와 같다. 각각의 카메라는 다른 진실을 보여주며, 이들을 모두 종합했을 때 비로소 사건의 입체적인 전모가 드러난다.

제2부 모델 I: 합리적 행위자 모델 (The Rational Actor Model)

  • 핵심 비유: 국가는 한 명의 천재적인 체스 선수다.

  • 분석 단위: 국가 (단일한 의사결정체)

  • 핵심 개념: 국익, 목표, 대안, 결과, 선택

모델 I은 가장 고전적이고 직관적인 분석 틀이다. 이 모델에서 국가는 마치 하나의 인격체처럼 행동한다. 국가의 모든 행동은 국익(National Interest)을 극대화하려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이루어진다.

작동 방식

  1. 문제 인식 및 목표 설정: 국가가 직면한 전략적 문제를 파악하고,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명확히 한다. (예: 쿠바에 배치된 소련 미사일을 제거한다.)

  2. 대안 탐색: 설정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모든 가능한 정책 대안을 나열한다. (예: 외교적 협상, 해상 봉쇄, 공습, 전면 침공 등)

  3. 결과 예측: 각각의 대안을 실행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긍정적, 부정적 결과를 예측하고 비용과 이익을 계산한다.

  4. 최적안 선택: 비용 대비 이익이 가장 큰, 즉 국익을 가장 극대화하는 대안을 최종적으로 선택하고 실행한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한 모델 I의 설명

  • 소련은 왜 미사일을 배치했는가? 냉전 시대 미국과의 ‘미사일 격차’를 단번에 만회하고, 미국의 코앞에 핵 위협을 가함으로써 전략적 균형을 바꾸려는 합리적 계산이었다.

  • 미국은 왜 해상 봉쇄를 선택했는가? 전면 침공이나 공습은 핵전쟁으로 비화될 위험이 너무 컸다. 반면 외교적 협상만으로는 실질적인 위협 제거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해상 봉쇄는 소련에 군사적 압박을 가하면서도, 공을 소련 쪽으로 넘겨 확전을 피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중간 지점’의 선택이었다.

  • 소련은 왜 미사일을 철수했는가? 미국의 확고한 의지와 핵전쟁의 공멸 가능성 앞에서, 미사일 배치를 통해 얻으려던 전략적 이익보다 철수를 통해 얻는 전쟁 회피라는 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한 합리적 결정이었다.

제3부 모델 II: 조직 과정 모델 (The Organizational Process Model)

  • 핵심 비유: 국가는 각기 다른 매뉴얼을 가진 여러 부서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장이다.

  • 분석 단위: 정부 조직 (국방부, 국무부, CIA 등)

  • 핵심 개념: 표준 운영 절차(SOPs), 조직 문화, 결과물(Output)

모델 II는 국가를 단일한 행위자로 보지 않는다. 대신, 정부는 제한적으로 조율되는 반(半)독립적인 하위 조직들의 연합체라고 주장한다. 이 조직들은 위기 상황이라고 해서 갑자기 새로운 행동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평소에 정해진 규칙과 절차, 즉 **표준 운영 절차(Standard Operating Procedures, SOPs)**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정부의 결정은 ‘선택’이라기보다는 조직들이 만들어낸 ‘결과물(Output)‘에 가깝다.

작동 방식

  • 문제의 분할: 복잡한 문제는 각 조직의 담당 영역에 따라 분할된다. (예: 미사일 탐지는 공군, 해상 차단은 해군 담당)

  • SOPs의 실행: 각 조직은 새로운 상황에 대해 과거부터 축적된 자신들만의 SOPs를 적용하여 대응한다. 이는 효율성을 높이지만, 상황에 맞지 않는 경직된 대응을 낳을 수 있다.

  • 제한된 유연성: 리더가 아무리 새로운 명령을 내려도, 조직은 자신들의 SOPs를 크게 벗어나는 방식으로 움직이기 어렵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한 모델 II의 설명

  • 미사일은 어떻게 발견되었나? 케네디가 특별 지시를 내려서가 아니라, 공군이 정기적으로 수행하던 쿠바 상공 U-2 정찰 비행이라는 SOPs의 결과물이었다.

  • 해상 봉쇄는 어떻게 실행되었나? 케네디는 소련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미사일 부품이 없는 유조선 등은 통과시키고 싶어 했다. 하지만 미 해군의 SOPs는 ‘모든’ 적성국 선박을 멈추고 검문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케네디의 유연한 의도와 해군의 경직된 SOPs 사이에 긴장이 발생했다. 해군은 자신들의 매뉴얼대로 봉쇄선을 설정하고 작전을 수행했다.

  • 소련 미사일은 왜 그렇게 쉽게 발견될 형태로 배치되었나? 소련군 역시 자신들의 미사일 배치 SOPs를 쿠바에서도 그대로 따랐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은폐보다는 신속한 작전 준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결과적으로 미국의 정찰기에 쉽게 발각되는 원인이 되었다.

제4부 모델 III: 정부 정치 모델 (Governmental Politics Model)

  • 핵심 비유: 국가 정책 결정은 권력자들이 벌이는 치열한 포커 게임이다.

  • 분석 단위: 개인 (대통령, 장관, 보좌관 등 주요 플레이어)

  • 핵심 개념: 협상(Bargaining), 타협, 연합, 권력, “당신이 어디에 서 있는가는 당신이 어디에 앉아 있는지에 달려있다(Where you stand depends on where you sit).”

모델 III는 결정의 초점을 조직에서 다시 개인으로 가져온다. 여기서 국가의 행동은 합리적인 선택이나 조직의 기계적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정부 내 다양한 직책과 이해관계를 가진 **핵수뇌부(players in positions)**들이 벌이는 치열한 ‘밀고 당기기(pulling and hauling)‘의 정치적 결과물이다. 앨리슨의 유명한 문구 “Where you stand depends on where you sit”는 이 모델의 정수를 보여준다. 즉, 공군참모총장은 공군의 이익을, 국무장관은 외교적 해결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작동 방식

  • 다양한 플레이어: 각 플레이어는 국가 전체의 이익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이익, 그리고 개인적인 신념과 경력까지 고려하여 입장을 정한다.

  • 정치적 게임: 이들은 대통령을 설득하고, 다른 플레이어와 연합하거나 경쟁하며 자신의 입장을 최종 정책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모든 권력과 영향력을 동원한다.

  • 결정은 타협의 산물: 최종 결정은 어느 한쪽의 완벽한 승리가 아니라, 여러 입장들이 혼합되고 절충된 타협안일 가능성이 높다. 때로는 최선이 아닌,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차선’의 안이 채택된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한 모델 III의 설명

  • 왜 ‘공습’이 아닌 ‘해상 봉쇄’였나? 케네디가 소집한 최고위급 회의체 ‘엑스콤(EXCOMM)’ 내부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커티스 르메이 공군참모총장을 비롯한 군부 강경파는 즉각적인 공습을 강력히 주장했다. 반면,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과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 등은 확전 가능성을 우려하며 해상 봉쇄라는 신중한 대안을 밀어붙였다.

  • 결정 과정: 최종 결정은 케네디 대통령이 여러 파벌의 주장과 논리를 듣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저울질하며 내린 결과였다. 특히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가 강경파의 논리를 효과적으로 반박하고 대통령을 끈질기게 설득한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즉, 해상 봉쇄안은 가장 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내부 정치 게임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채택된 것이다.

제5부 세 가지 모델 비교 분석 및 현대적 의의

이 세 가지 모델은 서로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다. 하나의 렌즈로는 볼 수 없었던 진실을 다른 렌즈가 보여주기 때문이다.

구분모델 I: 합리적 행위자모델 II: 조직 과정모델 III: 정부 정치
분석의 초점국가 전체의 선택정부 조직의 결과물핵심 개인들의 타협
국가에 대한 관점통일되고 합리적인 단일체반독립적 조직들의 연합체각축장을 벌이는 개인들의 집합
핵심 논리국익 극대화표준 운영 절차 (SOPs)협상과 정치적 게임
결정 과정목표 > 대안 > 결과 > 선택조직의 루틴과 프로그램개인 간의 밀고 당기기
쿠바 위기 예시’해상 봉쇄’는 최선의 선택해군의 SOPs가 봉쇄 방식을 결정엑스콤 내 강온파의 대립과 타협

현대적 의의

『결정의 본질』이 제시하는 분석 틀은 오늘날의 복잡한 국제 정세를 이해하는 데에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 북핵 문제: 북한의 핵 개발을 단순히 ‘비합리적인 도발’(모델 I의 한계)로만 볼 것이 아니라, 북한 내부의 군부와 당, 외무성 등 여러 조직의 역학 관계(모델 II)나 김정은 위원장과 핵심 측근들 사이의 정치적 논리(모델 III)를 함께 고려해야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하다.

  • 무역 분쟁: 한 국가의 무역 정책이 국익 전체를 위한 최선의 선택(모델 I)이라기보다는, 특정 산업계를 대변하는 부처의 영향력(모델 II)이나 대통령과 의회, 핵심 경제 참모들 간의 정치적 타협(모델 III)의 결과물일 수 있다.

결론: 복잡성의 세계를 항해하는 지도

그레이엄 앨리슨의 『결정의 본질』은 국가의 의사결정이란 하나의 잘 닦인 고속도로가 아니라, 여러 갈래의 길이 얽히고설킨 복잡한 교차로와 같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합리성의 렌즈만으로는 그 복잡한 길을 모두 볼 수 없다. 거대한 조직이 관성처럼 움직이는 힘과, 그 안에서 권력을 쥔 인간들이 벌이는 치열한 투쟁의 역학을 함께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결정의 본질’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이 세 가지 렌즈를 손에 쥔 우리는 이제 뉴스를 통해 접하는 수많은 국제 사건과 정부 발표의 이면을 더욱 입체적이고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강력한 지적 도구를 갖게 된 셈이다.